정호는 회의실에서 나온 뒤, 복도 끝 창문을 붙잡고 한참을 서 있었다.
서울 도심의 빽빽한 빌딩 숲이 보였지만, 그의 시선은 멀리 흐릿하게만 맺혔다.
“회장이라니…”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신이 상상할 수 없는 자리에 갑자기 던져진 느낌.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다가왔다. 선영이었다.
“괜찮아?”
정호는 애써 웃었다.
“괜찮은 척이라도 해야지. 사실은 무섭다.”
선영은 한숨을 쉬며 주변을 살폈다.
“팀장이 너 찍은 거 알아. 아마 너를 밀어내려고 더 크게 움직일 거야. 조심해.”
정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사람은 왜 나를 그렇게 미워하는 걸까?”
“단순해. 네가 말했잖아. ‘언젠가는 누군가 말해야 한다’. 그런데 그걸 네가 해버린 거야. 팀장은 절대 못할 말을 대신한 거지. 그러니 위협이 된 거야.”
같은 시각, 팀장은 따로 임원 한 명과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 자식, 그냥 두면 회사가 시끄러워집니다. 본부장까지 흔들리고 있어요.”
임원은 담배를 피우며 무심히 대꾸했다.
“흔들린다 한들… 윗선이 결정할 일이지.”
“아닙니다. 그 전에 잘라내야 합니다. 회장 앞에 세우기 전에… 무너뜨려야 합니다.”
팀장은 서류 가방을 열어 뭔가를 내밀었다. 그것은 정호의 과거 이력서 사본이었다.
“보세요. 이전 회사에서 퇴사 사유가 뭔지 아십니까? 공식적으론 ‘개인 사정’이라지만, 실제로는 상사와 갈등이었습니다. 이걸 이용하면 충분합니다.”
임원의 눈이 반짝였다.
“하… 흥미롭군. 네가 알아서 해봐.”
퇴근 후, 정호는 집으로 돌아왔다. 어린 아들이 달려와 안겼다.
“아빠!”
그 순간만큼은 긴장이 풀렸다. 아내 민지는 그의 표정을 보고 알아챘다.
“회사에서 힘든 일 있었지?”
“…내일, 회장님 앞에서 얘기해야 한대.”
민지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냥 평범한 직장인이 회장 앞에?”
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아내는 늦게까지 정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당신 말이 옳다는 건 알아. 그런데 회사가 받아들일까? 만약 불이익을 당하면…”
정호는 손을 꼭 잡았다.
“그래도 이번엔 피하지 않으려고. 누군가는 해야 하잖아.”
다음 날 아침, 출근길. 정호는 지하철에서 낯선 번호로 온 문자를 받았다.
“정호 씨. 당신의 생각이 필요합니다.
퇴근 후, XX카페에서 만나죠.
- 익명”
처음엔 장난이라 생각했지만, 직감이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알렸다.
퇴근 후, 카페에 들어서자 놀라운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경쟁사 임원이었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정호 씨.”
“당신은…?”
“이름은 중요치 않아요. 다만, 우리 회사는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금 회사에서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압니다. 만약 버티기 힘들다면, 언제든 우리에게 오세요.”
정호는 당황스러웠다.
“그걸 어떻게…?”
“기업들은 다 연결돼 있습니다. 당신의 발언은 이미 업계에 퍼졌어요. ‘사람을 중시하는 회사’라… 참 신선합니다.”
정호는 흔들렸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목소리가 속삭였다.
‘여기서 도망치면, 내가 지키고자 했던 건 뭐가 되지?’
정호가 집에 돌아오는 길, 낯선 남자가 뒤를 밟았다.
그는 휴대폰으로 어딘가에 짧게 보고했다.
“예. 계속 주시 중입니다. 움직임이 있으면 바로 보고하겠습니다.”
그 순간, 정호의 발걸음은 점점 더 무겁게 느껴졌다.
이제 단순히 회사의 문제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흐름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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